[제1차 경주시경계탐사] 안내자료- 석탈해탄강유허, 봉수대등 양남면의 문화재
[제1차 경주시경계탐사] 안내자료- 석탈해탄강유허, 봉수대등 양남면의 문화재
  • 경주포커스
  • 승인 2023.02.03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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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대 (교사.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김성대.
김성대.

경주시 양남면은 경주의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동해, 남쪽으로는 울산, 서쪽으로는 경주시 외동읍, 북쪽으로는 경주시 문무대왕면과 접해 있다.

신라시대는 신라 6부인 금산가리촌, 고려시대는 동경, 계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장기군에 속하여 양남면으로 된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의하며 경주군에 속한다. 1955년 경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월성군 양남면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면서 경주군에 속했다. 1995년 통합 경주시로 되면서 경주시 양남면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양남면에는 ①석촌, ②효도, ③나산, ④나아, ⑤환서, ⑥기구, ⑦수렴, ⑧서동, ⑨신서, ⑩신대, ⑪상계, ⑫상라, ⑬하서, ⑭석읍, ⑮읍천 15개 리가 속해 있다.

2008년 경주시 『문화유적분포지도』에 따르면 신석기시대 유적지(하서리), 청동기 시대 유적지(나산리, 하서리), 고인돌(상라리), 삼국시대 목책 유적지(하서리), 삼국시대 고분(나산리, 상계리, 하서리), 신라시대부터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신대리산성(신대리), 봉수대지(신대리, 하서리)가 조사되었다.

나아리에는 「석탈해탄강유허지」가 있으며 월성원전 부근에 조선시대에 세워진 「석탈해탄강유허비」가 있다. 상계리에는 서왕리(西旺里)가 있는데 신라 석씨 왕릉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옛날에는 석왕리(昔王里), 석왕릉리(昔王陵里)라고 불렀으나 마을 이름에 왕을 넣기 곤란하다고 하여 서왕리(西旺里)로 고쳐 부르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서왕리(西旺里) 북쪽에 신라시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석씨 임금의 능이라 전하는 석왕릉도 있다.

수렴리에는 「수영포」라는 마을이 있다. 수영포는 임진왜란 당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수군의 병영이 이 마을에 있었다고 하여 수영포라 하였다고 한다.

양남면 일대는 하서리를 중심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건국과 관련되는 「석탈해탄강유허지」를 통해 당시 이 일대에서 해양 문화를 받아들이고 더 넓은 바다로 진출한 당시 신라인들의 문화 의식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어어 온 「신대리산성」, 조선시대에 사용된 「대점봉수대지」와 「하서지봉수대지」, 마을 이름 「수영포(水營浦)」를 통해 바다로부터의 적을 막는 해양 전초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석탈해탄강유허비

석탈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살펴보면 바다를 통해 들어와 이 일대에 정착한 후 월성으로 진출하여 유리왕에 이어 신라 4대 임금으로 오른다.
1845년(조선 헌종 11년)에 하마비와 땅을 하사받고 고종 초에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일설에는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왕의 성은 석씨(昔氏)로, 왕비는 아효(阿孝) 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않다. 마땅히 버려야겠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더불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바로 시조 혁거세(赫居世) 재위 39년(B.C. 19)의 일이었다. 이때 바닷가의 할멈이 줄로 끌어서 바닷가에 매어두고 궤짝을 열어서 보니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 있었다.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니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풍채가 빼어나며 지식이 남달랐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처음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며 따라 다녔으므로, 까치 ‘작(鵲)’의 글자를 줄여서 ‘석(昔)’으로 씨(氏)를 삼고, 또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탈해(脫解)가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그 어미를 공양하였는데, 한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다.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배워 공(功)과 이름을 세우도록 해라.”라고 하니, 이에 학문에 정진하여 땅의 이치를 겸하여 알게 되었다. 양산(楊山) 아래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南解王) 5년(8)에 이르러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이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7년(10)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儒理王)이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써 왕위를 잇도록 하라.’라고 하셔서 과인(寡人)이 먼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마땅히 그 지위를 탈해(脫解)에게 전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유사 기록

남해왕 때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당시 포구의 해변에 한 할멈이 있었으니 이름은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海尺]의 모(母)였다. [아진의선이] 배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본시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해서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 하고 배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로 모여들고 배 안에 상자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자이고 넓이는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한 일인지를 몰라 하늘을 향해 고하였다. 잠시 후 궤를 열어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칠일 동안 잘 대접하였더니 이에 [사내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용성국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이십팔 용왕이 있는데, 모두 다 사람의 태(胎)에서 태어나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치고 정성(正性)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지만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자식 구하기를 기도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이 군신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니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더불어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 바다에 띄워놓고 축언하여 이르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봉수대

■하서지봉수대(下西知烽燧)

남으로는 울산의 남목봉수(南木熢燧), 북으로는 독산봉수(禿山熢燧), 서로는 대현봉수(大峴熢燧)와 서로 연결된다.
 

동여-경주ⓒ경주의 옛지도   해동지도ⓒ경주의 옛지도
동여-경주ⓒ경주의 옛지도                    해동지도ⓒ경주의 옛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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